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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 슈가(민윤기)

 


 

1. 덕질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덕질을 하는 자신이 싫은 순간이 있다. 다른 사람이 덕후라고 무시하거나, 아니면 내 취미가 보잘것 없다는 자괴감이 들 때 말이지.

사람들은 취미에 위계를 두는 성향이 있다. 그 취미를 즐기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가, 어떤 계층의 사람이 즐기는가, 지적/신체적 능력이 얼마나 필요한가 등등 여러 기준에 따라 위계를 나눈다. 여러 취미 중에서 덕질은 인식이 좋은 취미가 아니다. 그리고 덕질 대상에 따라서도 그 인식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독서, 운동, 공연 감상 등의 취미와 덕질을 다르게 취급한다. 덕질이 앞의 '보통 취미'와 다른 것은 환상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세계관이 명확한 환상. 보통 사람들은 현실에 불만족스러울 때 환상을 필요로 한다. 좌절된 출세욕구, 번식탈락 등등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는 현실에 만족스러운데도 덕질하는거거든!'이라 주장할 수도 있지만,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덕질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덕후 중에서는 현실이 불만족스러운 사람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덕후들도 인정하는, 소위 찐따 같은 모습이 덕후의 표상이 된다. 사람들은 이 점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느끼고 덕후를 무시하기도 한다. 왜 수많은 덕후 중에서도 왜 오덕페이트를 덕후의 상징이라고 생각할까. 환상이 필요한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떨어지는 존재일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덕질 대상에 따라서도 위계가 나뉜다. 연예인 덕질 중에서도 배우덕질보다 아이돌 덕질이 더 무시당한다. 아이돌 덕질은 더 많은 환상을 제공한다. 배우는 보통 자신의 연기와 작품을 판다는 시선이 강하지만, 아이돌은 컨셉트로 포장한 자신을 팔면서 덕후에게 환상을 제공한다. 그래서 배우보다는 아이돌이 열애설에 더 큰 타격을 입는다. 열애설이 나면 환상이 깨진 팬들이 돈을 덜 쓰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등으로 대표되는 2D 덕후는 더 많은 무시를 당한다. 수많은 제약이 있는 현실과 달리 2D 세계에서는 원작자가 원하는 대로 더 크고 어처구니 없는 환상도 만들어낼 수 있다. 현실과 점점 더 동떨어진 환상 속에 살고 싶어할 수록 현실에 불만족할 확률이 높다. 또 그 환상속에 갇혀 지내면 일상 생활의 적응력도 떨어질 수 있다.

2.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든간에, 현실에 만족하지 못할 때 삶의 원동력을 덕질에서 얻는 것은 분명히 긍정적이다. 어쨌든 살기는 해야 되잖아. 그럼에도 사람들이 덕후에게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것에 대한 염려다. 아미들은 방탄소년단이 큰 여혐논란을 일으켰음에도, 방탄은 무해하다는 환상을 지키기 위해서, 오히려 여혐을 지적한 사람을 사이버 불링하기도 했다.

매우 극단적인 사례로는 동춘동 살인 사건을 들 수 있다. 자신들의 우정을 지켜주는 역할극의 환상을 영속시키는 것이 생명보다 소중했던거니까. 현실보다 자신의 환상을 우위에 두어서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 사람들이 가진 불안감이다.

이런 불안감은 외부의 시선 뿐만이 아니다. 덕후 스스로도 가지고 있다. 여혐성혐오적 언행을 한 방탄소년단을 좋아함으로써, 나 개인은 행복을 느끼지만, 내가 사회의 여성혐오를 만연하게 하는데 이바지한게 아닌가하는 자괴감도 여기에 속한다. 글쎄. 이 갈등에서 각자는 다른 선택을 한다. 다른 사람이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되는 문제다.

페미니스트임을 주장하면서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내 의견을 밝히자면, 방탄은 많은 여혐을 했으나 이미 성공했다. 방탄의 주소비층은 여혐 문제에 둔감한 층이라는 뜻이다. 여혐 때문에 방탄을 불매해도 방탄이 입는 산업적 타격은 미미하다. 방탄소년단의 여혐을 지적하는 여론을 형성하는 것과 불매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방탄 불매는 개인적인 의미만을 갖는다.

방탄 불매를 선택한다면 자신에게 여혐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일관되게 할 수 있다. 방탄을 소비하기로 결정한다면 방탄이 자신에게 주는 에너지와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고. 각 개인이 판단해야 할 문제다.

3. 일관성있는 페미니스트 행보와 방탄이 주는 환상 사이에서 오래 갈등하는 것도 불필요한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도 한다. 결국 그 환상이 필요하다는거 아닌가. 환상이 필요없었으면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불매했을 것이다. 그 환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고, 고민할 시간에 낙태 합법화 시위에 나가거나 서명운동을 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아이돌을 좋아하는건 자신의 인생과 사회를 바꿔놓을만한 위중한 결정이 아니다. 아이돌 탈덕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닌지.

첨언하면, 아이돌 덕후라고 무시받고 자괴감을 느끼는 것이 싫다고, 자신의 욕망을 억지로 억누르고 다른 판으로 가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어차피 다른 판으로 가도 또 아이돌 덕질처럼 덕질한다. 아이돌 덕질하다가 정치덕후판으로 온 사람들 대부분 댓글 부대로 이용만 당하더라.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자기에게 맞는 판에서 노는게 자신에게 이롭다.

2018.03.12 by. 루이보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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