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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티파니

0.

얼마 전에 '그러다가 정병온다'는 댓글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장난삼아 한 댓글이지만. '나 이미 정병환자인데'라는 생각을 했다. 병원에서 인정한 우울증 환자니까. 정신병 환자가 맞기는 하다. 내 질병국제분류코드는 F321 '중등도의 우울증'이다.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사회생활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상생활도 불가능했던 적도 있는데 뭘. 이런 저런 노력을 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우울한 편이었다. 기질적 원인에 자취, 채식으로 인한 영양결핍이 겹쳤고, 대학시절 모의고사 만큼 나오지 않은 수능점수 탓만 하면서 몇 년을 보냈던 것 같다. 그 때 가졌던 불안감과 분노는 지금 많이 낮아졌고 꽤나 많이 행복해졌다.

1.

나는 학벌과 전문성에 약한 편이다. 의사 말을 매우 잘 듣는 편이다. 신문 의학코너에 '우울증은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는게 아니라, 세로토닌이 부족해서 생기는 생물학적 질병입니다'라고 의사가 인터뷰를 하면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가서 약 먹으라면 약 먹고 회의감을 느껴도 계속 갔던것 같다. 나는 의사의 전문성과 현대의학을 믿으니까. 의사 말을 잘 들었다.

약을 먹으면서 실제로 내 분노는 낮아졌고, 그 동안 분노에 가려져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왜 그 때 그 사람이 그랬는지 억울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될 수가 있더라. 화가 줄어드니까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시뮬레이션을 할 수가 있었다. 타인조망이 가능해졌고 대인관계도 원활해지고 세상에 원망이 줄어들었다.

온라인에서 정병왔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병원 가보라고 하고 싶다. 아직까지는 그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안심하고 있겠지만 심각해지면 치료기간만 길어진다. 정신병원에서 '나는 정신병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정신병이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퇴원시켜준다는건 옛날 유머다. 우울증 없는 사람들은 죽는걸 두려워하더라. 자살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더라. 질병은 가벼울 때 치료해야 빨리 나을 수 있는거니까.

2.

근데 의사는 상담보다는 약 처방이 중심이다. 서밤님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leeojsh/220594435806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상담 잘하는 의사는 드물다. 상담을 통해서 증상을 조절한다기보다는 약 처방을 위해 환자의 상태 변화를 파악하기 위한 상담일 경우가 더 많다. 상담이랑 병행하는게 더 낫다. 우울증에 걸리면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생물학적으로 세로토닌의 양을 조절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울증 때문에 생긴 잘못된 신념도 바꿔야 우울증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약만 먹는걸로는 한계가 있더라.

상담을 하면서 과거의 잘못된 기억을 바꿨고, 나를 괴롭히는 잘못된 신념들을 교정했다. 내가 실수로 가격비교 사이트를 검색해서 최저가로 사지 않았을 때 지나치게 자책하거나 하는 점은, '나는 돈을 허투루 쓰면 절대 안된다, 나는 그만큼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잘못된 신념 때문이었고 그 점들을 찾아내서 교정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생각들을 갖고 있는지 그 원인을 파헤치면서 불필요하게 나를 옭아메는 신념들을 없애면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곤 했다.

만성적인 가족 문제가 있었는데, 작년에 가족 구성원 모두가 30회기에 걸쳐서 상담을 받았다. 가족 모두가 상담에 응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고 하니 나는 비교적 운이 좋았던 편이다. 수십년간 쌓였던 문제들이 드러났고, 드러나면서 서로간에 이해가 깊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모두가 시간을 내어 상담에 응한다는 것 자체가 가족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고. 그러면서 가족 관계가 부드러워졌고 내 증상도 많이 완화되었다. 가족의 문제가 나에게 집중되어 내가 폭발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약물치료도 중요하지만 상담도 중요하다. 나는 상담할 때 그냥 다 말하는 편이었다. 상담가도 비밀보장의 의무가 있으니까. 그렇게 교육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하겠지 하면서. 내 블로그 글도 다 보여주고 그랬다. 최대한 나를 투명하게 전시하면서 나를 알아가고 바꿔가는 작업이었다. 약물과 함께 상담도 받아보는걸 추천한다.

3.

지금 내가 일상속에서 하고 있는건 칭찬 감사일기 쓰기와 모닝페이지 쓰기, 운동이 있다. 칭찬 감사 일기 쓰기는 매일 감사한일과 내가 잘한일 50가지를 쓰는 일이다. 100일 동안 채우고 나면 자존감이 많이 올라갈거라고 해서 쓰고 있는데 지금 62일까지 썼다. '얼마 전에 구매한 스마트폰 케이스를 계속 잘 쓰고 있어서 그 때 잘 고른 것 같다' 이런 사소한 칭찬까지 모두 다 써내려간다.

칭찬감사일기를 쓰고 나면 나에게 매일 감사한 일이 50가지씩은 일어난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상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고, 내가 일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가진 잘못된 신념 중에서는 '내가 최선을 다해봤자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믿음이 있었다. 칭찬 감사일기를 쓰면서 '세상이 나를 잘 돌보고 있다'는 믿음이 생겨서 삶에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매일 감사한 일 50가지를 생각해내는 시간은 부정적이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화가 차올라있더라도 내가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감사해진다. 세상이 나를 돕고 있고, 내가 일을 잘 해결해나가고 있다는 믿음이 강해진다. 100일을 채우면 자존감이 올라가고 긍정적으로 바뀔거라는 말이 사실일 것 같다.

모닝페이지는 그냥 내 생각을 계속 적어내려가는 것이다. 아침에 미리 쓰는 일기라고 보면 된다. 쓰다보면 오늘 있을 일을 예상하게 되고 내가 그것을 미리 계획하고 컨트롤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진다. 의미 없이 보내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이다. 내 삶을 구성하는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바꾸는 작업이라 역시 행복도 상승에 도움이 된다.

걷는걸 워낙 좋아하는지라 산책은 꾸준히 하는 편이다. 머리 속에 생각이 너무 많은 편이라서 걷지 않으면 생각이 정리가 잘 안되는 편이기도 해서 산책을 꾸준히 해왔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때는 산책도 불가능했는데, 그런 날에는 쓰레기 봉투를 버리기 위해서라도 어쨌거나 한 번은 집 밖으로 나가곤 했다. 확실히 집 밖을 한번이라도 나갔다 온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은 뇌 속 회로가 다른 느낌이었다. 매일 산책을 하고 있지만 산책하는 걸로 부족해서 주 4회 요가를 하고 있는데, 요가를 하면서 내 몸이 더 유연해진다는 성취감도 느끼고 있고 마음을 편아하게 하는 법도 배우고 있다.

4.

인터넷. 혹자는 우울증 환자가 인터넷을 하는 것을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는 행위'라고 하기도 한다. 바닷물을 마시면 처음에는 갈증이 해결되는 것 같아도 더한 갈증이 온다. 외로움이 일시적으로는 해결되는 것 같아도 오프라인 관계에 소홀해지거나 자기 자신에게 소홀해지기도 한다. SNS가 정신건강에 좋다는 논문은 거의 발표되지 않은걸로 안다. 유일하게 정신건강에 좋은 SNS가 유튜브라는 연구결과도 봤는데, 유튜브로 뭘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인터넷을 줄이면서 내 정신건강은 많이 좋아졌다. 지금은 트위터도 하고 ask.fm도 하지만, 작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인터넷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정보가 없어서 좋더라. 주로 인터넷에서는 부정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그리고 정신병 환자들의 인터넷 체류시간이 더 길다. 정신병 환자끼리 서로 악영향을 주고 받을 여지가 많아진다. 서로 잘못된 신념들을 주고 받으면서 세상에 대한 분노만 더 쌓도록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고. 정보를 얻고 싶으면 신문, 라디오 등 기존의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일단 한 번은 정제되었기 때문이다.

덕질을 하면서 인터넷 사용량이 늘어났지만 다시 서서히 줄여갈 예정이다. 그러면서 정보원을 다양화하고 있고 오프라인에서의 즐거움도 찾고 있다.

5.

'약 먹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라면서 지레짐작으로 포기하는 것도 정신병의 증상이다. 본능적으로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보호하려고 상담이나 정신과를 회피하고 싶어하는 현상도 있다. 그래도 그걸 이겨내고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하면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믿는다. 자기 계발서 카피에도 나오잖나. '인생은 반품은 안되어도 수리는 된다'고. 나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 모두 다 빨리 회복되어서 행복한 삶을 찾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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