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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A 설현

요즘 페미니즘을 명분으로 여자 아이돌들을 비난하는 일이 온라인 상에서 자주 일어난다. 페미니즘이 대중화 되기 이전에도 여자 아이돌들은 줄곧 비난받고는 했다. 표정이 좋지 않다고, 어투가 무심하다고 사소한 것들로 트집을 잡혔지. 페미니즘이 대중화 된 이후로 달라진 것은 여자아이돌을 비난하는 명분에 페미니즘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것 정도다. 여자 아이돌들을 원색적으로 인신공격하며 비난하는 곳은 주로 여초 커뮤니티다. 남초 커뮤니티는 여자 아이돌의 인격이나 성격에 관심 없고 오로지 몸만 보면서 성희롱을 하니까.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자매애가 왜 여자 아이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

여자 아이돌들을 비난하는 논리는 이거지. '여자 아이돌들이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남자들에게 성적 환상을 제공하는데, 남자들은 그래서 성범죄를 저지르고 그런 이미지가 유통되어서 여성인권이 떨어진다(이하 S논리)'고. 그래서 여자 아이돌을 공격한다고. 근데 결국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남자들이잖아? 남자는 왜 욕하지 않아? 이러면 남자도 욕한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나의 아저씨>출연으로 아이유가 받은 비난의 양과 질, 이선균이 받은 비난의 양과 질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걸.

S논리의 문제점을 말해보자. 애초에 데이트 폭력과 성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남자다. 그 남자가 무엇을 봤든지 상관이 없다. 영화 <볼링 포 컬럼바인>에서는 미국의 총기문화는 지적하지 않고 오로지 게임과 락 음악에만 총기 사고의 원인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볼링은 왜 원인이 되지 않는가'를 지적하면서 조롱한다. 데이트 폭력과 성범죄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의 강간문화가 만연한 것은 지적하지 않고 왜 여자 아이돌에게 원인을 돌리는 걸까. 미투 운동에서 드러난 가해자들이 과연 여자 아이돌들 때문에 성범죄를 저질렀던걸까? 한국 사회의 복잡한 구조와 분위기는 제쳐두고,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을 끌어오려고 이유를 갖다 붙인건 아닐까? 정말 한국의 성범죄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이 여자 아이돌 때문인가?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자 아이돌이 한국에서 사라지면 되는가?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여자는 남자를 타락시키는 존재'라는 여성혐오는 뿌리 깊다. 사실 S논리 역시 여기에서 기인한다. 남자는 원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인데, 여성이 유혹으로 남자를 타락시킨다는 논리. 원래 성범죄를 저지를 생각이 없었던 남자에게 여자 아이돌을 보여주면 타락해서 성범죄를 저지른다는 논리다. 남자는 죄가 없고 타락시킨 여자가 잘못이지.

80년대에는 남자가 시험에 떨어지면 그 남자의 어머니가 여자친구 때문에 성적이 떨어졌다고 여자친구에게 찾아가서 머리채 잡는 일도 흔했다. 60년대에는 남자가 병에 걸리면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면서 그 부인이 오히려 학대 받는 일도 흔했다. 2000년대 결혼 리얼리티 프로에서도 '나는 남자가 지저분하게 다니면, 남자를 욕하지 않고 그 남자의 부인을 욕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여성이 출연했었다. 남자가 잘못되면 남자는 그 책임에서 자유롭다. 그 책임을 져야하는건 그 주변의 여성이다. 이제는 성범죄의 책임을 성범죄자가 봤던 매체에 출연하는 여자 아이돌들이 져야한다.

한국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슬럿워크라는 운동이 있었다. 캐나다의 한 경찰이 '여성의 헤픈 옷차림이 성범죄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에 반발해서 일어난 시위였다. 사회적으로 '헤프다'고하는 옷차림으로 차려입고 '내 옷차림을 핑계로 강간하려 하지 마라'라고 외쳤던 시위였다. 여성은 무슨 옷차림을 하든지 성범죄에서 안전해야한다. '여자가 헤픈 옷차림을 입었기 때문에 성범죄가 일어난다'는 주장에는 반발하면서, '여자 아이돌들이 헤픈 춤을 추기 때문에 성범죄가 일어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는거 이상하지 않나? 여자 아이돌을 비난하는 것은 성범죄자가 져야할 책임을 약화시키고, 성범죄자가 댈 수 있는 변명거리를 늘려주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이 S논리에는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 역시 존재한다. '나는 남자가 성범죄를 일으키도록 하지도 않고 페미니즘까지 배운 성녀이고, 여자 아이돌은 페미니즘도 모르고 남자를 유혹하기에 급급한 창녀에 불과하다'는 논리 아닌가? 각각 개별적이고 다양한 인격을 가진 여성들을 페미와 안티페미로 나누고 비난하는 논리가 어째서 페미니즘의 가치에 부합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런 논리라면 마녀 사냥 역시 페미니즘적이라는 논리가 가능한데. 그 당시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려서 고문당하고 화형 당한 여자가 없었을것 같나? 미국에서 흑인들이 당당하고 주체적이지 못해서 차별을 받는걸까? 아시안이 리더십이 없어서 리더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걸까? 여자가 주체적이고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성차별이 생긴게 아니다. 수동적이고 남에게 비굴한 남자들도 많거든. 차별 받는 원인을 차별당하는 사람들의 특징에서 찾는건,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 밖에 안 됨. 비굴하든 당당하든 차별받아서는 안 되고, 차별하는 사회를 개혁하는게 맞지.

이런 말을 하면 혹자는 '남자는 말이 안 통하는 가축이기 때문에 같은 여자를 설득하는거다'라고 반박을 하는데, 이래서 지나친 남성혐오는 페미니즘에도 좋지 않다는 거다. 남자는 채용에서 이득을 볼 때는 우월한 존재로 포장되다가, 성범죄 등의 책임을 져야할 때는 본능을 이길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 책임을 면제받는다. 남자를 지나치게 열등하게 생각하면 남자에게 책임을 묻기가 어려워진다. 남자도 호모사피엔스 종이다. 개혁되어야 할 대상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성범죄의 원인까지 남자 대신 여자가 비난받아야 하는 상황은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나.

남자는 변화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남자를 사용하는 남자사용설명서를 배워서 남자가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여자가 노력해야한다는 논리 아닌가. 남자는 변하지 않는 상수에 놓고, 여자가 노력해야하는 변수가 되어서 여자가 움직여야 한다는 논리가 과연 이로울까.

여자는 구조의 책임에서 자유롭다. 여자가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구조를 만들고 변화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를 기획하고, 제작을 하고, 제작비를 받아오고, 방송국 편성 시간을 받고, 전파를 타게 만들기까지의 과정에 도대체 여자의 힘이 얼마나 들어갔을것 같나? 그런데도 책임을 져야한다면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사람은 아이유다. 왜 여성혐오의 책임까지 여자가 져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여자 아이돌을 욕하는건 페미니즘과 전혀 상관이 없다. 케케묵은 여성혐오 논리에서 나온 발상에 페미니즘의 글자를 갖다 붙인다고 페미니즘이 되는게 아니지.

(201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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