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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범죄와의 전쟁>, <비스티 보이즈> 감독인 윤종빈의 졸업 작품. 영화가 2005년 개봉이었는데, 당시 영화제에서 상들을 휩쓸었고 평단의 평가가 매우 좋았다. 당시 막 떠오르기 시작했던 군인권 문제를 매우 사실적으로 다뤘다고 하면서 호평을 받았다.

<용서 받지 못한 자>가 호평 받은 이유는 <건축학 개론>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건축학 개론>을 보며 첫사랑에게 찌질하게 굴었던 한국 남자들이 속죄 받은 기분을 느꼈듯이, <용서 받지 못한 자>를 보면서 군대에서 겪었던 딜레마와 트라우마에 속죄 받은 느낌이었겠지.

이 영화가 2005년 작품이니 당시 군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지금 마흔살 언저리일 것이다. 부대 내 총기 난사사건으로 군대 인권 문제가 화두가 되기 시작했던 당시. 이후 군대 내 환경 개선 노력이 있었으니 이 영화에 나온 모습들이 그대로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안에 나온 부조리한 모습은 여럿이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빽빽한 공간, 외부와의 연락이 힘든 상황 등등 열악한 환경요인들도 한 몫을 했으니까.

영화에서 나온 성희롱, 가혹행위, 부조리한 문화가 더 섬뜩하게 느껴진 이유는 중년 남성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후임병이 성희롱 당하고 구타당하는 장면을 코미디 보듯이 보면서 웃고, 후임병을 괴롭히는 장면에서 선임병에 감정이입해서 웃는 모습이란. 심형래 코미디에서 사람을 때리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세대의 인권 감수성이 그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군대 인권 문제의 가장 큰 걸림돌이 군에서 제대한 남성들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군대 내 부조리한 문화가 싫지만 순응해야 살 수 있는 자신의 모습에 갈등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최근의 페미니스즘 논란으로 갈등을 겪는 여성들이 생각이 났다. 군대라는 부조리한 공간 안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과 여성혐오 사회라는 부조리한 사회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여성들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더라.

주인공은 두 명. 유태정은 부조리한 군대 내에서도 잘 적응하는 현실주의자. 선임들에게 적당히 아부도 하며 생존 전략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후임병을 갈굴 때도 있지만 심각한 수준이 아니지. 이승영은 이상주의자. 군대 내의 부조리한 분위기에 반기를 들며 갈등을 일으킨다. 부조리한 군대 문화를 바꾸려고 하지만 결국 생존하기 위해 군대 문화에 물든다.

그 외에 인상에 남았던 인물형들은 수동과 허지훈. 수동은 군대 내의 부조리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사람이다. 사회에서는 열등감을 느낄만한 명문대 생도 후임으로 들어오면 괴롭힐 수 있고, 신발도 자기 손으로 챙기지 않는 권위적인 자신의 모습을 즐기며 후임병을 죄책감 없이 괴롭힌다. 허지훈은 어리버리한 인물로, 군대 내 부조리한 모습과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한다.

군대를 가부장적인 사회로 놓고 각각의 인물형들을 최근의 페미니즘 유행어로 해석하면, 이승영 = 사회에 반기 들며 갈등을 일으키나 무력한 래디컬 페미니스트, 유태정 = 여성혐오 사회가 부조리한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흉자, 수동 = 가부장제에서 오는 반사 이익을 즐기는 소수의 최강 흉자, 허지훈 = 가부장제의 희생양 정도로 들 수 있을텐데.

나는 유태정의 스탠스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군대 문화를 개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지만, 무작정 치고 나가서 실속없이 무너지는 이승영보다는 행복했으니까. 이승영은 유태정을 비난한다. 니가 군대에서 원만하게 잘 지냈다고, 니가 과연 잘 한 것 같냐고. 이런 비난도 유태정이 더 행복해보였기 때문에 할 수 있지.

그렇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유태정도 군대 트라우마 때문에 제대 이후에 이승영을 만나는걸 피하고 싶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군대 내 생활이 원만했어도 정신적 고통이 남았다는거지. 흉자들이 생각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도 가부장제에 상처받지 않고 살겠니.

여성혐오 사회에서 다른 여자 피를 빨아먹는 수동 같은 인물형 누가 있을까. 성노동 이론을 들먹이면서 다른 여자에게 성매매를 권유하는 포주, 가부장적 가정에서 며느리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누리려는 시어머니... 또 누가 있겠지. 혐오스러운 타입은 수동 같은 타입이지.

가장 비참한건 허지훈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해버리는 것. 허지훈보다는 수동이 낫습니다. 일단 여성이 살아남는게 더 중요하니까요. 어떤 여자든지 간에.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여성혐오적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여성을 공격할 만한 이유가 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군대 생활에 잘 적응했던 유태정을 공격한다고 군대 인권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허지훈처럼 자살을 해야만 했나. 아니면 이승영처럼 계속 괴롭힘과 구타를 당했어야 했나. 군대 인권 문제는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저항이 아니라, 민관군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개선책을 논의하는 구조적 개선을 통해서 나아지고 있습니다. 여성 혐오 문제도 여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고통받으며 저항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구조적 문제 개선 등 해결책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적응하고 있는 여자를 흉자라고 공격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2018/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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