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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던 정치인이 목숨을 끊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생각했다.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서 독재 정권과도 맞서 싸웠던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도덕성에 흠집이 날 수 있다는 게 치명적인 상처였던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

사람이 무너질 때 외부의 적 때문에 무너지는 예도 있지만,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도 많다. 자신이 지키려고 했던 소중했던 것들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져 버린다. 때로는 그것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가 원했던 이상향일 수도 있고, 지키고 싶었던 사명감이나 가치일 수도 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나의 세계가 된다, 그 사람이 뭐라고 그러면 전 세계가 나에게 뭐라고 그러는 게 된다’는 말에 동의한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말을 동등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같은 말을 해도 타인이 했을 때와 부모님이 했을 때 다르게 받아들인다. 싫어하는 사람이 말했을 때와 좋아하는 사람이 말했을 때도 다르게 받아들인다. 자신이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의 반응이 더 크게 다가온다.

연인에게 ‘세상에서 누가 제일 멋지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냐’는 말 역시 이와 같다. ‘너의 기준이 나로 변했니?’라는 뜻이다. 사랑이 기존에 갖고 있던 기준들이 다 해체되어서 그 사람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예뻐 보이는 게 당연하다. 나도 방탄소년단 RM을 좋아하기 전에는 못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방탄소년단 사진을 보면 잘생긴 진이나 V보다도 RM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거든. 그런 거 아니겠나.

다른 팬과 싸울 때는 장비가 장판파에서 수많은 장수를 상대하듯이 싸우던 팬이, 좋아하던 아이돌의 열애설에는 하염없이 무너지는 것 마찬가지다. 외부의 적인 다른 팬의 비난은 견딜 수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자신의 환상을 무너뜨려 버리면 속절없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케이팝 덕질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사랑의 기준이 케이팝 아이돌로 변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화려한 외모, 수많은 성과,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음 등등 케이팝 아이돌이 보여주는 모습들만이 멋진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돼서 그런 게 아닐까. 케이팝 아이돌이 가진 가치들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 다른 분야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힘들 수 있지.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그래서 취향이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만큼 더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거든. 덕후가 덕질 대상을 사랑하듯이 사랑한다면 그 덕후는 사랑하는 것에 영향받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쉬운 이유는 그 사람과 나 자신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공통점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나에 대한 사랑이 동시에 커진다. 나와 다른 점만을 사랑하다가 결국에는 자신보다 그 다른 점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져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예도 있지 않나. 몇 달 전에 아이돌 팬들을 울렸던 ‘아이돌을 쫓아다니면서 아이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 자신을 버려두고 있었다’라는 탈덕문처럼.

2.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도, 사랑하는 가치가 무너져도,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사라져가도 그래도 계속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목숨 걸고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존재가 떠나거나 사라져도 곧 의미 있는 것들을 찾고, 자신의 삶이 부질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삶을 지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냉소적인 타입이라서 아마도 몇 년 전의 내가 이 글을 봤다면 무슨 오글거리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런데도 늘 나는 뭔가를 사랑해왔다. 가족들에게는 짜증 내면서도 동물권은 믿었던 적도 있고, 페미니즘과 자매애를 신봉했던 적도 있고, 해외의 정치인 덕질을 한 적도 있다. 세상 모든 걸 부정하면 살기가 너무 힘들거든.

우울증으로 받은 상담도 결국은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비틀린 시각을 교정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 사람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다. 우울증 증상 중의 하나가 자신과 자신의 삶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나.

케이팝 덕질을 하든 정덕질을 하든 실제 연애를 하든 숭고한 가치를 숭배하든 그것만이 절대 진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만약 그것이 떠난다 해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걸 알았으면.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끝까지 누리다가 갔으면 좋겠어.

(1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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