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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지겹다, 왜 그러냐.’는 피드백을 받으면서까지 트랜스젠더 숙명여대 입학 관련 글만 5개 올렸나. 나도 지겨워졌다. 그리고 환멸이 생김. ‘페미니즘은 교양인의 필수 덕목 중 하나라고 했는데 명제가 참이라고 역이 참이 아니듯이, 페미니스트라는 점이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음.

이제 입학 반대자 중 일부가 사실을 이야기하더라.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이제껏 남자들에게 느꼈던 공포와 분노를 트랜스젠더 합격생 한명에게 분풀이한 거지. 트랜스젠더가 그렇게 무서웠으면 ‘CCTV 없는 곳에서 각목으로 후려치겠다’, ‘트랜스젠더는 내시’, ‘다같이 둘러싸고 원숭이 쳐다보듯이 쳐다보자운운하셨을 리가 없잖아요.

아직도 입학 반대자들은 트랜스젠더 입학 지지자는 남자나 다를 바 없다고 주장을 하는데, 트랜스젠더 입학 반대를 그 모양 그 꼴로 추하게 하지 않았으면 내가 입학지지 입장을 표명할 이유도 없었음. 한국여성연합에서 트랜스젠더 입학지지 글을 올리니까 왜 올렸냐고 하는데, 반대자들이 먼저 시작했잖아. 그렇게 혐오 논리가 가득한 성명서를 페미니스트 이름으로 올렸는데 가만히 있으면 같이 매도당할 판이잖아.

나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정체성의 일부로 삼는 편인데, 페미니스트라는 이름도 내 정체성의 일부로 삼았음. 반대자들이 페미니스트 완장을 차고 트랜스젠더 혐오를 하는데, ‘트랜스젠더 혐오는 페미니즘과 상관없어요, 트랜스젠더를 존중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습니다.’하면서 목 놓아 외쳐야 하는 것 아니겠음.

이번 일을 겪으면서 페미니스트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되었는가의 여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 까놓고 이야기해보자. 어떤 사람도 성범죄 가능성 0%인 사람은 없음. 이번 합격생이 성범죄 가능성 0%라는 보장 못함.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성범죄 가능성 0%가 아니고, 이 글을 읽는 사람도 0% 아님.

트랜스젠더 재학생의 성범죄를 막으려면 트랜스젠더 입학을 막으면 됨, 여자들이 밤길 다니는 것이 위험하면 여자들이 밤길 다니지 않으면 됨, 해경을 해체하면 해경이 일을 못하는 일은 없어짐, 인류가 멸망하면 인간이 저지르는 성범죄도 사라짐. 재기해, 재기해 염불 외우다가 진짜 사람 없애는 걸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건가.

그 합격생의 성범죄 위험이 높은 이유는 XY염색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위대한 XX염색체를 가진 학생들은 왜 그렇게 폭력적이었음? 이번 사건에서 합격생이 쓴 글과 반대자들이 쓴 글 중에 어느 글이 더 폭력적이었나. 실제 물리적 위해를 예고한 글도 있었음. XX염색체를 가진 사람도 이렇게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셈 아님?

여자든 남자든 사람을 들이는 건 리스크를 감수하고 하는 것임. 여자와 남자가 섞여있으면 성범죄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음. 그렇다고 여성의 취업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가서는 안 됨. ‘나는 폭력 행사 예고를 해도 안전한 존재다. 왜냐하면 XX염색체이기 때문에. 폭력적이지 않은 대응을 했지만 그 사람은 위험하다. XY이기 때문에.’ 람들이 자기는 안전한 존재로 받아들여 줘야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는 무조건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가정 아래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인성은 도대체 무엇임?

남자들은 모두 잠재적 성범죄자다라는 말은 강간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낮아져서 어떤 남자든지 성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뜻임. 사회 문화와 제도, 환경을 개선해서 성범죄를 최대한 예방하고 성범죄가 발생하면 단호하게 대처하며, 피해자가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말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XY 염색체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성범죄자 취급하자는 뜻이 아님. 왜 여성 운동 문구를 이런 식으로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을 하지. 이게 정말 여성 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물론 이번 일이 반드시 여성운동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음. 나는 워마드 홍대 누드모델 사건 때도 패착이었다고 생각했음. 남자 몰카 찍는게 여성인권에 무슨 도움이 됨? 그러나 경찰이 여자가 피해자일 때와는 대조적으로 신속하고 단호하게 수사했고, 언론은 과잉 취재를 했지. 이런 모습에 분노한 페미니스트들은 멋진 시위를 해냈음. 다이나믹 코리아.

이번 일도 나는 잘못되었다고 보지만, 누군가가 더 큰 잘못을 함으로써 좋은 방향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우연이 계속 반복될 수 있을까?

내가 믿는 이론은 이건데, 내 이론에 너의 정체성은 들어맞지 않아라니요. 거기에 더해서 내 이론에 따라서 너의 정체성은 법적으로 인정되면 안 돼라니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이론이 있는 건데. 내가 좋아하는 이론에 맞지 않는 존재를 없애겠다는 자기중심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옴?

아이돌 덕질을 할 때 어떻게 하면 아이돌 덕질을 교양있게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계속 했음. 결론은 교양있는 사람이 되면 된다였음. 다른 사람 험담을 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도 존중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파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면 되더라고.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인 것 같음. 인성 잘못된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명분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더라고. 성별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지, 페미니즘 이슈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음.

더 이상 트위터에서 페미니즘 이슈로 싸울 때마다 신경쓰고 싶지도 않고, 페미니스트 이름 달고 또라이짓하는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홀가분함. 먼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겠음. 민우회 후원하고 서명운동 참여하면 그만이지 뭐.

2020/02/04 - [페미니즘] -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반대자들이 질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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