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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주말부터 트위터에서 방탄소년단 관련 알계정이 급속도로 많이 생겼다. 알계는 트위터 익명 계정을 말하는데, 자신의 온라인 자아를 걸고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만들고 이용한다. 알계정이 많이 생겼다는 건 주로 불만이나 뒷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라 좋은 일이 아니다. 방탄소년단 알계정이 저번 주 주말에 많이 생긴 이유는 역조공 논란(역조공 논란을 지켜보면서), 방탄 특유의 딱딱 맞아떨어지는 칼군무의 실종, 팬 사인회의 무성의한 태도 때문이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해외투어로 국내 활동이 줄어들고, 앨범 방향이 기존 팬덤이 원하던 방향과는 달라지고, 팬 미팅 가격 급등, 소속사의 안일한 대처 등등의 불만이 쌓여있었다. 역조공 논란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였을 뿐이다.

알계에서는 '도대체 팬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안무가 맞지 않는다, 연습 잘하고 있는 거냐', '팬 사인회에서 팬 외모에 따라 팬서비스가 달라진다' 등등의 불만들이 나와 있는데, 내 기준에서 새로운 건 없다. 평소에 나나 내 주변인들이 종종 하고는 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면 나와 비슷한 팬들 다 탈덕할거다', '우리가 탈덕하면 하락세 올 텐데 괜찮겠냐'등등의 미래예측(?)도 있다.

오히려 순덕(순종적인 덕후)들이 알계를 저격하는 게 더 흥미로웠다. '트위터를 안 보는 게 탈덕이지, 방탄소년단 계정을 새로 하나 더 만들어서 까빠질하는게 무슨 탈덕이냐', '자기가 좋아서 돈 써놓고 왜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냐', '탈덕을 못하 아니라 탈트위터를 못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거칠어도 나름대로 일리는 있더라.

알계들이 '우리 코어들 떠나면 방탄 망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거 남자친구랑 헤어질 때, 나랑 헤어지면 남자친구는 초라해지기를 원하는 심리 같은 거 아니냐. 내가 해줬던 거 줄줄이 늘어놓고, 이럴 줄 몰랐다고 배신감 느끼면서 화내는 것부터가 유사연애 서사. 7080줌마단과 0708주접단 등등의 타인을 비난하는 것도 그렇고. '우리 관계는 좋았는데, 다른 사람이 우리의 사랑을 망쳐놨어'하는거지 뭐. (첨언하자면, 국뽕러들이 유입되기 전인 15, 16년도부터 아미들은 사이버 불링으로 다른 사람 입막음 하는걸로 유명했답니다. 당시 트페미들에게 아미들이 어떤 존재였는지 물어보세요. 국뽕러들 유입되기 전에도 유사연애 금지에 내꺼드립도 하지 못하게 했다면서요.)

지금 알계들이 느끼는 분노는 고시 뒷바라지 해줬는데 남자가 고시에 합격하고 변심하니 거기에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함. 그러면 남자는 나쁜 놈이 맞는데 딱히 뾰족한 수도 없잖아. 고시 합격의 영광을 누리고 싶었으면 본인이 고시를 봐서 합격해야지, 남자친구 뒷바라지를 해주는건 어긋난 선택인지라. '내가 희생했으니까 당연히 나와 결혼해야 해'라고 강요할 수가 있나.

내친김에 더 비유하자면 까빠들은 연애할 때 '내가 주도권 잡아야 한다'는 강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내가 더 좋아하는걸 들킬까 봐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상처 주고, 싫은척하며 흥흥거리면서 하는 연애랄까. 좋게 말해서 츤데레지 사실 감정 표현에 문제 있는 사람임. 물론 상대가 아이돌이서 상처받지는 않겠지만 이런 연애가 건강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지.

좋으면 좋다고 하고, 좋은 만큼 표현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게 좋은 연애인데 말이지. 아이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일부러 만들어내서 표출할 필요는 없잖음. 좋아하는 감정이 죄인 것도 아닌데.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부정적으로 보는 건 다르잖아. 소비자로서 더 나은 방향을 위해서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것과 무작정 조롱하는 건 다르니까. 이 경계선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억지로 좋아하는 감정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돌 덕질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는 취미생활이잖아.

결국 유사 연애도 연애라서 건강한 덕질을 하는 법은 건강한 연애하는 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껏 좋아하되 독립심을 잃지 말것,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거, 상대방에게 뭐를 바라고 주지 않는 거, 상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거 등등.

친구가 돈 빌려달라고 그러면, 빌려주지 말고, 갚지 않아도 될 만큼의 돈을 그냥 주는 게 최선이고 하잖아. 돈 못 돌려받는다고. 그걸 각오하고 도와주라고. 덕질도 다시 돌려받는 건 불가능하니까 다시 돌려받지 못해도 될 만큼만 하는게 맞지 않나. 지금 내가 즐거운 만큼만 덕질했으면 저렇게 화가 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RM이 대놓고 파이드 파이퍼에서 너희 현생 챙기라고 말하잖아. 표현이 건방지기는 했지만 속 뜻은 '방탄소년단이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줄 수 없습니다'라는 뜻이겠지. 방탄소년단이 팬들의 인생에 맞춰서 살아줄 수도 없고, 팬이 방탄소년단에 맞춰서 살아 줄 수도 없고. 결국에는 남남이 될 사이라면 이별이라도 깔끔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기억만 갖고 가는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방탄소년단이 팬들이 원하는걸 맞춰줄 수 있겠냐 하면 아닐것 같다고 대답할 수 밖에. 예전처럼 독기 품고 칼같이 군무 맞춰서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예전처럼 팬서비스를 살갑게 해줄 것 같지도 않음. 방탄소년단의 이런 변화에 맞는 대응전략은 '계속 소비자로서 요구하되 기대는 하지 말라'는거 아닐까. 기대하면 계속 절망하게 되잖아. 아니면 다른 아이돌로 갈아타던가 탈덕을 하던가.

이래서 깊게 파는 것보다는 가볍게 간잽해가면서 여럿 파는 게 더 나은 것 같음. 이미 너무 많은 돈과 시간, 노력을 투자다고 해도 그건 매몰 비용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내가 가장 즐거울지 생각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로 다른 아이돌들도 간잽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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