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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를 '세상에 성차별이 만연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성차별이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페미니스트였다. 전여옥의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 이미지를 좋아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전여옥의 책들을 읽었고, 직업적으로 성공한 여성을 동경했던 터라 성공한 여성들이 쓴 책들을 많이 읽었다. 수필도 좋아하던 터라 여성들이 쓴 수필들도 많이 읽었는데 그 글들에서 여성으로서 받은 차별들이 많이 나타나 있어서 늘 같이 가슴 아파하고는 했다. 어려서 본격적인 여성학책은 읽지 못했고 오한숙희가 쓴 책같이 가벼운 교양서 위주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고 늘 그 사실에 억울해했다. 그렇지만 거기에 동조해주는 친구들은 거의 없어서 늘 외로웠다. 그러다 2015년 트위터에서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졌고,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페미니스트 동지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감동하여 컴퓨터 앞에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2019년 10월 현재, 누군가 나보고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다면 나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대답할 것 같다. 그동안 페미니스트의 기준이 너무 올라가 버렸다. 2015년 막 페미니즘 붐이 일었을 때는 '성차별에 반대한다면 누구나 페미니스트입니다,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구호를 외치고는 했다. 지금은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탈코르셋, 4B(비 연애, 비 섹스, 비결혼, 비출산), 남자 아이돌 팬 활동 금지 등등의 여러 가지 조건들을 지켜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나는 나페미 해시태그 때부터 5년째 민우회를 후하고 있는 회원이다. 페미니즘 책도 읽고, 일상생활서 여성주의적 발언도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남자 아이돌 팬 활동을 하고 있지. 아직 완전히 탈코르셋을 하지 못했고, 살면서 연애도하고 싶다.

얼마 전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머리 장식을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것이 여성 인권을 억압하는 것일까? 베르사유 궁전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찬양하는 사람도 있고, 국민들을 착취해서 만든 기득권자의 성이라면서 분노하는 사람도 있는데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는 트윗을 해서 비판받은 적이 있다. '여성을 캔버스처럼 아름다움을 위한 도구로 쓰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비판에도 일부 동의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오로지 여성주의적 기준으로만 판단되어야 하는 분위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베르사유 궁전을 계급주의로만 판단하는 공산주의자처럼 머리 장식을 여성주의적 잣대로만 판단해서, 혐오해야 하는 분위기가 갑갑했다.

나의 삶도 페미니즘 기준으로 보면 모순투성이이고 잘못된 선택도 많다. 그렇지만 다른 기준에서 보면 그 선택이 정말 잘못된 것만은 아닌 경우도 많거든. 예를 들어서 내가 방탄소년단 팬 활동을 했던 것도 마찬가지. 방탄소년단은 남자 아이돌이고, 여혐 가사로 유명한 아이돌이다. 남자 아이돌 팬 활동 자체가 여성 혐오적 요소들이 있는데 거기에 여성 혐오 가사로 유명한 방탄소년단 팬 활동을 하는 건 더더욱 여성 혐오적이다. 그런데 나는 방탄소년단 팬 활동을 하면서 내 안의 인종 콤플렉스를 극복했거든. 나와 같은 한국인이라는 요소를 지닌 그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인정받는 것을 보면서, 나 역시 인종적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인종 콤플렉스 극복은 내 인생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고 나는 방탄소년단 팬 활동을 하면서 그 과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면서 더 행복해졌고 내 정신건강은 더 좋아졌다. 방탄소년단 팬 활동을 하기 전과 후를 비교해보면 팬 활동을 한 후가 더 성장했다. 퇴행하지 않았다. 방탄소년단 팬 활동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현재의 페미니즘 앞에서 이런 점은 무시되고 나는 오로지 '남자 아이돌에 빠져서 자신의 인권을 떨어뜨린 사람' 취급을 받는다. 여성인 나 개인은 분명히 더 행복해졌는데.

누군가는 이것을 보고 준거집단을 여성이 아니라 한국인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성이기도 하고 한국인이기도 하다. 오로지 나의 정체성을 100% 여성으로만 잡을 수는 없다. 나의 피부색, 성별, 종교, 언어, 국적, 가진 신념 모두가 나를 구성한다. 나는 납작한 존재가 아니라 입체적인 존재다. 그런데 자꾸만 그것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인간으로서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는데, 현재의 페미니즘은 나의 인생을 여성주의적인지 반여성주의적인지 두 가지로만 나눠서 평가한다.

이런 점이 페미니스트 자체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딱히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다. 정치에 입문하려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필요하다. 소수자의 대표가 되려면 자신의 피부색을 받아들여야 한다. 언어학자가 되려면 자신의 언어에 애정을 품고 있어야 한다. 오로지 여성이라는 정체성만으로 판단하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요즘은 페미니즘의 이론을 알고 페미니즘적 실천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냥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여성으로 살아나가면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 여성들이 힘을 얻는데. 그리고 행복하게 살면 되지 뭐. 나는 계속 민우회를 후원할 것이고, 페미니즘 책도 계속 읽고, 언론에서 다루는 여성 의제에도 계속 관심을 가질 것이다. 집회도 가능한 참석할 것이고.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트위터에서 다루는 페미니즘의 의제나 분위기, 실천 권고 사항은 따라갈 수가 없다. 일단 내 삶이 우선이니 내 삶을 챙기면서 페미니즘은 부수적으로 해나가야겠다. 지금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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