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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계속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왔다. 근데 지금은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하고 싶지 않다. 여성학 이론 공부도 별로 하고 싶지 않고, 페미니스트 이미지도 계속 나빠지고 있고,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한들 여성 인권에 크게 도움이 될까 싶고.

여성학 이론 공부를 하기 싫은 이유는,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보려고 하는데 책의 목록과 두께에서부터 질려버림.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를 놓고 토론을 하려면 알아야 하는 지식이 왜 이리 많은지. 설익은 지식으로 어설프게 논쟁을 하는 편보다는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합니다.'라는 쉬운 문장을 실천하는데 노력하는 쪽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성경 공부는 하지 않지만 기독교도입니다'라는 말은 우습잖아. 차라리 공부를 안 할 거면 페미니스트 딱지를 떼는 편이 더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사람들과 같은 카테고리로 묶이기도 싫음. 나는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 보다, 호주제 폐지에 공을 세운 진선미 의원이나 남인순 의원이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더 큰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그들의 발언 내용이나 시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넷 페미들이 그들을 적폐 취급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아이러니하게 느껴짐. 얼굴, 이름 다 드러내고 사람들과 토론하고 싸워가면서 사회를 변화시킨 사람을 비판하면서, 신상을 철저하게 감추는 넷 페미가 '내가 진짜 페미니스트다, 저들은 가짜다'라고 주장하는 모습이 우스움.

물론 넷 페미들도 소라넷 폐지, N번방 사건 공론화, 혜화역 시위 등등에 공을 세우기는 했지. 그런데 홍대 도촬 사건이나 호주 국자 사건을 옹호하는 모습 등등을 보고 있으면 과도 많음.

계속 다른 여자들을 비판하고 검열하는 것도 피곤하고. 올해 한 번도 마카롱 먹어본 적 없지만 '마카롱이 핑크택스네, 아니네' 주기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 피곤함. 여자 연예인을 페미니즘 핑계로 비난하는 것도 모순이고.

페미니스트라는 딱지를 떼는 데에 가장 걸림돌이었던 점이 죄책감이었거든. '다른 여자들은 여성 인권을 위해서 힘쓰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 무임승차한다.'는 죄책감. 근데 모든 여자가 여성 인권 운동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죄책감도 사라짐.

독립운동 예시를 많이 드니까 독립운동 예시를 들자면 일제 강점기 때 모든 한국인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독립운동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독립운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

모두가 독립운동을 한다 해도 문제인 것이, 36년 동안 각자 맡은 분야에 충실해야 할 것 아님. 언어학자는 국어를 연구해야 하고, 아동들은 교육을 받아야 하니 교사가 있어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 농사짓는 사람도 필요하고. 사회가 유지되어야 독립운동이 의미가 있음. 괜히 소시민이 사회를 구성하는 뼈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 독립된다 한들 한국 사회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전 국민이 일제와 싸우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았지. 외교, 무장 투쟁, 자강 등등의 노선으로 나갔지.

마찬가지로 모든 여성이 여성 인권운동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함. 일상을 유지하고 사회에서 버티고 있는 여성들이 있어야 여성인권운동도 성립하지 않겠어. 아이유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든 아니든 가수를 꿈꾸는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듯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다른 여성들에게 힘이 될 수 있지.

그리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성은 여성 인권을 극적으로 끌어올릴 힘도 없지만 여성 인권을 극적으로 후퇴시킬 힘도 없음. 이완용 같이 후대에 욕먹는 친일파는 아무나 하냐.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하지.

여성 인권을 위해 힘써온 수많은 선대 페미니스트들을 존경하고, 지금 나와 같은 시대에 여성 인권운동을 하는 수많은 페미니스트도 존경해. 하지만 굳이 나까지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 없다는 생각임. 그냥 내 삶을 잘 꾸리는 것이 우선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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