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한창 쿠키런 중독일 때 정신과 의사가 나에게 스마트폰 사용 대신 피처폰 사용을 권했다. 그때 나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고, 워낙 기계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10년 만에 피처폰을 새로 산다는 생각으로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시험에 떨어져 놓고 핸드폰을 바꿀 생각이나 하다니 이해되지 않는다'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스마트폰을 피처폰으로 교체하는 것은 큰 변화를 선택한다는 의미였다. 2020년 한국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포기한다는 것은 많은 제약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더욱이 온라인 세계에 의존도가 높은 내가 스마트폰 사용을 포기하면 다른 사람보다 생활에 더 많은 변화가 생길 터였다.

내가 선택한 핸드폰은 LM-Y120.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쓰고 있지만 새로운 앱 설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피처폰이나 다름없다. 카카오톡과 같은 기본 앱 설치도 안 되고, 제공되는 편의 기능도 스마트폰 이전의 저가형 폴더폰과 동일하다. 다만 라디오 기능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피처폰으로 바꾸고 나서 생긴 변화는 길에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에 스마트폰을 켜지 않게 되었다는 것, 택배 송장을 분쇄기에 넣고 분쇄하는 등의 자투리 일을 미루고 스마트폰을 보는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전의 나는 최대한 스마트폰을 자주 보려고 했고, 온라인 세계와 최대한 많이 접촉하려고 했다. 내가 의식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랬다. 그런데 더 스마트폰에 화면이 아니라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공간을 바라보고, 내 주변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 의식이 온라인에서 현실로 옮겨온 것이다.

내 일상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어서 내 옷에도 관심이 생겼고, 내 몸에도 더 많은 관심이 생겼다. 앞으로의 내 미래 일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내가 할 일을 하고 집중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덕분에 요즘 자격증도 따고 좋은 일이 생기고 있다. 내가 스마트폰만 본다고 불평하던 주변인들도 좋아하더라.

물론 인터넷은 여전히 많이 한다. 그런데 과거에는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화제가 되는 이슈들에 관심이 많았다면, 지금은 내 커리어와 관계된 자격증 정보 등을 검색한다. 스마트폰은 화면이 작아서 그런가, 왜 그런지 딱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인터넷을 하는 편이 더 생산적이더라고. 쇼핑몰에 들어가서 옷을 구경하고, 유튜브 영상이나 보고. 조금 더 일반인에 가까워진 듯하다. 

부가적인 장점도 있다. 데이터 사용량이 엄청나게 줄어든다는 것. 21일간 사용한 데이터가 119MB다. 내가 선택한 Y120도 인터넷이 가능하기는 한데 키패드로 주소를 입력해서 정보를 찾고, 저화질의 작은 액정으로는 인터넷을 하기가 불편해서 인터넷을 하지 않게 된다.

대신 라디오랑 더 친해졌다. 라디오 기능이 있거든. 귀가 심심하면 이어폰을 연결해서 라디오를 듣는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면 댓글까지 보게 되지만, 기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해주는 뉴스를 듣고 있으면 화가 덜 난다. 맞다, 요새 화도 많이 줄었다.

삼성페이를 쓰지 못하게 되어서 편의점 지출이 줄었고, 정말 수험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다.

나쁜 점은 연락의 부재. 카카오톡이나 밴드를 노트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실시간 확인은 느리다. 지도와 가계부, 스마트폰 뱅킹 기능도 아쉽다. 카메라 화질도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아직은 피처폰 사용에 장점이 많아서 계속 쓰려고 한다. 10월이 되면 데이터 적은 요금제로 바꾸려고. 연락을 실시간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고려해볼 만 하다고 느꼈다.

반응형

+ Recent posts